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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앤유] 위대한 화가, 고흐의 롤모델은 누구?

안녕하세요. 삼성이야기 에디터, Sam입니다.

독학으로 그림에 입문한 반 고흐에게,
밀레는 영혼의 멘토였다고 합니다.
 
평생 밀레의 그림을 모사하고,
예술뿐만 아니라 삶의 태도까지 배우고 싶어 했다는데요~
 
위대한 화가 반 고흐와 멘토 밀레의 이야기를
삼성앤유가 소개해드립니다.

※ 아래 글은 삼성앤유에 소개된 컨텐츠를 블로그용으로 수정한 글입니다.


롤모델을 따라 인생의 주연이 되다

글 정민영(미술평론가)

조물주는 모든 인간에게 천재적 능력을 선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물주는 평범한 피조물이 의지하고 따를 수 있는 롤모델을 여럿 빚어놓았죠. 하여 롤모델의 업적과 범부의 창의력이 만나 세상이 더 윤택하고 새로워졌으니 그 빛나는 피조물 중 한 명이 밀레를 롤모델 삼아 위대한 화가로 거듭난 빈센트 반 고흐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 정오-낮잠
빈센트 반 고흐, <정오-낮잠>, 캔버스에 유채, 73×91cm, 1889, 오르세 미술관

소설가 신경숙은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동안 필사(筆寫)를 하면서 보냈다고 한다. 서정인의 <강>을 시작으로 최인훈의 <웃음소리>, 김승옥의 <무진기행>, 이제하의 <태평양>,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 이청준의 <눈길>, 윤홍길의 <장마>, 최창학의 <창>, 강호무의 <화류항사> 등 선배들의 소설을 노트에 옮겨 적는 일을 하며 그 여름을 지냈다. 그녀는 그때의 경험을 산문집 <아름다운 그늘>에서 이렇게 토로한다.

그냥 눈으로 읽을 때와 한 자 한 자 노트에 옮겨 적어볼 때와 그 소설들의 느낌은 달랐다. 소설 밑바닥으로 흐르고 있는 양감을 훨씬 더 세밀히 느낄 수가 있었다. 그 부조리들, 그 절망감들, 그 미학들. (중략) 필사를 하는 동안의 그 황홀함은 내가 살면서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각인시켜준 독특한 체험이었다

필사를 통해 소설에서 길을 찾은 그녀는 출간하는 소설마다 베스트셀러에 올리는 우리 시대 대표적인 소설가가 되었다. 또 시골의사로 유명한 박경철은 글 쓰는 재주가 없어서 오정희의 소설을 무려 열 번이나 반복해서 필사했다고 한다. 그 역시 필사 과정을 거쳐 베스트셀러 저술가로 자리 잡았다.

서른일곱의 짧은 생을 살다 간 빈센트 반 고흐 (1853~1890)는 어떤가. 그는 문인이 필사하듯 선배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의 그림을 열렬히 모사(模寫)했다. 신경숙에게 선배 작가들이, 박경철에게는 오정희가 롤모델이었듯이, 반 고흐에게는 밀레가 예술과 삶의 롤모델이었다.


평생 스승 밀레의 그림을 모사하다

<만종>과 <이삭줍기>로 유명한 밀레는 파리 근교 바르비종에서 농촌 풍경과 농부의 모습을 그리면서 농민 화가로 명성을 얻은 대표적인 바르비종파 화가다. 반 고흐는 생전에 밀레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림을 시작했을 때 이미 고인이 된 밀레를 평생의 스승으로 삼았다.

독학으로 그림에 입문한 그에게 밀레는 영혼의 멘토(Mentor)였다. 멘티(Mentee)로서 반 고흐는 밀레의 예술과 삶에서 용기를 얻고 작품을 모사하면서 예술의 진경(眞境)을 체감한다. 그것은 신경숙의 표현을 빌리면 그림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양감을 훨씬 더 세밀히’ 느끼고 깨치는 과정이었다. 특히 자살하기 1년 전 자발적으로 들어간 생레미 요양원에서는 밀레 작품 스무 점을 집중적으로 따라 그렸다. 그때 그는 이미 아마추어가 아닌 어엿한 화가였다. 그럼에도 초보자처럼 모사를 계속했다. 왜 그랬을까.

반 고흐는 스승 밀레처럼 농민 화가로 생을 일구고자 했다. 그런데 생레미 요양원에서 농민화를 실습하는 길은 밀레의 그림을 모사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단순한 모사가 아니었다. 그에게 ‘밀레의 소묘에 근거해 유화를 그리는 것은 단순히 모사한다기보다 도리어 ‘다른 언어로 번역한다’는 느낌’(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이 강했다. 연주자가 베토벤의 곡을 연주할 때 자기 특유의 해석을 가미하듯 반 고흐도 모사하되 자기 스타일로 그렸다.

장 프랑수아 밀레, 정오-낮잠
장 프랑수아 밀레, <정오-낮잠>, 담황색 종이에 파스텔, 28.8×42cm, 1866, 보스턴 미술관

밀레의 이 작품은 라비에유의 목판화 <정오-낮잠>과
반 고흐의 유채화 <정오-낮잠>의 모사 대상이었다.


라비에유, 정오-낮잠
라비에유, <정오-낮잠>, 목판화, 14.8×22cm, 1866

라비에유가 밀레의 <정오-낮잠>을 본떠 제작한 목판화.
반 고흐는 이 목판화를 보고 밀레의 작품을 상상해 자신만의 <정오-낮잠>을 완성했다.


1889년경에 그린 <정오-낮잠>은 ‘창의적인 번역’의 정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농민 부부가 보리를 벤 뒤 보리 더미 그늘에서 낮잠 자는 모습을 담았다. 오른쪽 보리 더미 아래 부부가 누워 있고 그 옆에 낫 두 개와 신발 한 켤레 그리고 멀리 소 두 마리가 한가롭게 풀 뜯는 모습이 그림에 어우러졌다. 이 그림은 밀레의 걸작을 모사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1866년 밀레가 파스텔로 그린 원화와 비교해보면 형태가 정반대다. 왜 그럴까.

이 그림은 1873년 한 미술 잡지에 목판화로 실렸는데 반 고흐가 보고 그린 것은 파스텔화가 아니라 목판화였다. 재미있게도 이 목판화는 밀레가 직접 제작한 것이 아니었다. 목판화 전문가인 라비에유가 1866년 밀레의 파스텔화를 바탕으로 제작한 것이다. 비교해보면 목판화의 방향과 반 고흐의 그림 방향이 같다. 반 고흐는 흑백의 목판화를 보고 모사한 뒤 상상으로 그림을 완성했다. 그것은 의미 있는 재창조였다. 형태를 바꾸고 나름대로 색깔을 입혔다. 색채가 원화와 다른 이유다. 원화에는 없는 파란색 하늘이 대표적이다. 비록 질감이 부드러운 밀레의 파스텔화를 모사했지만 반 고흐 특유의 거친 붓질과 강렬한 색깔에 의해 그림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띤다. 밀레의 그림보다 느낌이 더 강하다.

반 고흐의 모사는 그림에만 그치지 않았다. 밀레의 예술 세계뿐만 아니라 삶의 태도까지 배우고자 했다. 그에게 삶의 스승은 밀레뿐이었다. 그런 가운데 반 고흐도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모두가 창조적인 모사의 결실이었다.


롤모델이 낳은 위대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65cm×54.5cm, 오르세 미술관

롤모델은 인생의 전봇대다. 어두운 길이나 눈밭에서 전봇대 같은 목표물을 정해두고 가면 걸음걸이를 똑바로 할 수 있듯이 자신이 닮고 싶은 인물의 삶과 지혜를 벤치마킹하면 훗날 월등히 성장한 자신을 만날 수 있다. 밀레는 반 고흐가 평생 흠모한 롤모델이었다. 밀레의 그림을 모사하고 그 삶을 닮고자 탄광촌 생활까지 하면서 비로소 반 고흐는 자신이 선택한 예술가의 길이 옳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리고 밀레를 뛰어넘는 위대한 화가가 되었다.

롤모델이란 한 사람의 외형보다 그가 숙성시킨 정신에 더 큰 의미가 있다. 그 정신의 지향점이 한 인간의 삶을 곧추세우고 조연이었던 위치를 주연으로 뒤바꾼다. 선배 작가의 소설을 필사했던 신경숙이 후배 작가들의 롤모델이 되었듯이 반 고흐는 롤모델로서 후배 화가들의 가슴을 뛰게 했다.


명작스캔들

반 고흐가 가장 많이 모사한 밀레의 걸작


장 프랑수아 밀레, 씨 뿌리는
장 프랑수아 밀레, <씨 뿌리는 사람>, 캔버스에 유채, 106.6×82.5cm, 1850, 보스턴 미술관

반 고흐가 가장 열심히 모사한 밀레의 작품은 <씨 뿌리는 사람>(1850) 이다. 어두운 화면을 꽉 채운 농부가 힘찬 발걸음과 손놀림으로 비탈진 밭에서 씨앗을 뿌리는 그림이다. 이미 깔리기 시작한 어둠과 지평선 위를 나는 까마귀 떼에 아랑곳하지 않고 농부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앞만 보고 씨를 뿌린다. 일몰 직전 마지막 씨 뿌리기를 서두르는 농부의 마음마저 뭉클하게 표현했다. 밀레는 이 주제로 세 점 정도 그렸으나 현재 두 점이 남아 있다.

한 점은 미국 보스턴 미술관이 다른 한 점은 일본 야나마시 현립미술관이 각각 소장하고 있다. 둘 다 진품인데 보스턴미술관 소장본이 더 힘 있고 곡선 처리가 탁월하다는 평이다. 예전에 야나마시 현립미술관 소장본을 보유했던 미국 필라델피아의 프로비던트 은행은 이 그림을 본떠 로고로 사용했는가 하면 일본의 명문 출판사 이와나미 서점도 이 그림을 로고로 사용했다.

빈센트 반 고흐, 씨 뿌리는 사람
빈센트 반 고흐, <씨 뿌리는 사람>, 캔버스에 유채, 25×31cm, 1888, 개인 소장

<씨 뿌리는 사람>이 미국에 팔린 것은 1855년이다. 따라서 1853년생인 반 고흐가 이 그림을 보았을 가능성은 없다. 반 고흐는 생레미 요양원에 갇힌 채 이 그림을 새긴 작은 판화를 자기 방에 걸어두고 생의 마지막까지 그리고 또 그렸다. 그렇게 해서 현재 남아있는 반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은 무려 열 네 점이나 된다. 반 고흐의 편지에 따르면 실제로 그린 이 작품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다.

밀레의 원화와 반 고흐의 모사 작품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은 밀레의 원화나 판화에서 거의 생략된 농부의 이목구비가 반 고흐의 모사작에서는 뚜렷하다는 점이다. 밀레가 농민의 슬픈 운명을 표현하는 데 비중을 둔 것에 비해, 반고흐는 씨를 뿌리는 농민의 의지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또 초기에는 농부를 원화처럼 화면에 꽉 차게 그렸으나 후기에는 동일한 포즈의 농부를 태양이 가득한 밀밭 속에 작게 배치하곤 했다. 밀레의 주제에 반고흐가 독창적인 해석을 가한 것이다. 반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은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뜨거운 ‘오마주(Hommage)’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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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지은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 잘 읽었어요. 좋은 멘토를 만난다는 건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 만큼이나 인생에 큰 보물인 것 같네요.

    • http://blog.samsung.com 삼성이야기

      좋은 멘토의 존재는 삶의 전환점이 될 정도로 중요하죠.
      계속해서 좋은 이야기 들려드릴 테니 자주 찾아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