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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스포츠단] 오늘을 살고, 내일을 준비한다! 오승환 선수의 My story 2편

안녕하세요. 삼성이야기 에디터, Sam입니다.

삼성라이온즈의 영원한 끝판대장으로~
자신의 자리에서 항상 최선을 다하는 마무리투수로~

오승환 선수의 야구 인생 두번 째 이야기를 공개합니다.

삼성스포츠단 소속 선수의 과거와 현재, 꿈과 희망을 느낄 수 있는 시리즈 콘텐츠 ‘스타다이어리’를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무서웠다. 하지만, 일어서고 싶었다

2010년 10월 15일 인천 문학구장. 한국시리즈 1차전이었다. 삼성이 5회 초 3-2 역전에 성공했고, 나는 몸을 풀기 시작했다. 5회 말 2사 만루의 위기가 찾아왔다. 더그아웃에서 ‘호출’이 왔다. “네 차례다.” 코칭스태프의 믿음이 전해졌다. 나는 공을 꽉 쥐었다. 하지만 SK 박재홍 선배에게 볼넷을 내줬고, 김재현 선배에게 2타점 역전 적시타를 허용했다. 나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 물었다.

오늘을 살고, 내일을 준비한다! 오승환 선수의 My story

2010년 7월 12일, 나는 오른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았다. 내 생애 두 번째 수술. “처음도 아닌데, 괜찮습니다.”라고 주위 분들을 안심시켰지만 나도 걱정이 됐다. 수술 당일, 내 팔에 뚫리는 ‘구멍’이 보였다. 무서웠다. 하지만 “이 재활을 마치고 나면 다시는 아플 일이 없을 거다. 차라리 잘 됐다.” 나는 그렇게 주문을 걸었고, 다행히 구속을 되찾았다. 그런데 복귀 첫날, 삼성에 중요한 승부처에서 나는 내 역할을 하지 못했다. 팀은 결국 한국시리즈에서 패자가 됐다. 나를 믿어주신 코칭스태프와 동료에게 죄송했다.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참 아프게 남아 있다.

한국시리즈 종료 뒤 ‘오승환이 이 상처를 극복할 수 있을까?’라는 말이 들려왔다. 난 평범한 선수였다. 팀에 미안한 마음이 내 가슴을 찔렀다. 동시에 “내가 언제부터 대단한 선수였다고…”라는 반성이 시작됐다.   2005년 스프링캠프. 프로 입단의 감격이 가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나는 ‘높은 벽’을 봤다. “여기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정말 자신이 없었다.

2004년 삼성은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차지했다. 투수진은 정말 대단했다. 배영수 선배는 당시 한국 프로야구의 에이스였다. 전병호 코치님•박석진 코치님•(임)창용이 형 등 바라만 봐도 주눅이 드는 선배들이 계셨다. (권)오준이 형도 자리를 잡은 상태였고, 나보다 어린 권혁•안지만도 ‘프로 선수의 풍모’를 갖췄다.

‘첫해’만 생각하지 않았다. “올해보다는 내년, 내년보다는 내 후년을 생각하자”는 마음으로 공 하나, 하나를 던졌다. 땀이 흘렀고, 구속이 점점 늘었다. 한국은 여전히 겨울. 그런데 뜻밖에도 나에게 봄이 일찍 찾아왔다.

“주목할 신인”으로 꼽혔던 오승환

나는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주목할 신인”으로 꼽혔다. 1군 투수로 데뷔 첫해를 시작했다. 당연히 ‘지고 있는 상황’에서 마운드에 섰다. 그때는 스코어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이 타자만 막자. 점수를 내주지 말자!’라고 생각했다. 포수의 사인만 봤다. 선배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유심히 살피고, 조언을 깊이 새겼다.

점점 팽팽한 상황에서 등판 지시를 받았고, 시즌 중반 이후 마무리로 나섰다. 그렇게 정신없이 한 시즌을 치렀고, 10승 11세이브 11홀드를 기록했다. 다양한 기록 이를 쌓는 동안 나는 여러 상황에서 승부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배웠다. 신인이던 내가 한국시리즈 마무리 투수로 나가 3경기를 무실점으로 막아낸 것도, 그 경험 덕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 실패를 맛보고 다시 시작한 2011년. 스프링캠프를 시작하면서 나는 2005년을 떠올렸다. 이제 갓 프로 무대를 밟은 신인들, 1군 무대를 노리는 1.5군 동료와 함께 생활했다. 2005년의 나와 같이 기대와 걱정을 동시에 안고 공을 던지는 선수들. 나는 그들과 똑같이 공을 던졌다. “정말 열심히 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로 시간과 열정을 쏟았다. 두려움은 점점 자신감으로 변했다. 시즌과 동시에 ‘공에 힘이 있다’는 느낌이 왔다. 1승 47세이브 평균자책점 0.63. 내 생애 최고의 성적이었다.

2011년 10월 31일. 상대는 다시 SK였다. 사실 솔직히 말하자면 2010년 가을의 악몽이 떠오르기도 했다.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기억은 절대 잊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아픈 기억은 때론 더 나은 결과를 낳는다. 2011년 가을, 나는 운이 좋게도 우리 팀이 승리한 경기에 모두 나섰다. 10월의 마지막 날,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가 펼쳐졌다. 감사하게도 나는 팀의 마지막 투수로 마운드에 올랐고, 실점 없이 경기를 마쳤다.

팀의 마지막 투수, 삼성라이온즈 오승환 선수

오승환, 빨리 와!

경기가 끝나고, 잠실구장 3루 쪽 삼성팬들이 외쳤다. 댄스곡 ‘흔들어주세요’가 흘러나왔다. 나도 모르게 곡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정말 행복했다.

정상에서 시작한 2012년. 4월 24일 대구 롯데전에서 나는 ⅔이닝 4피안타 6실점으로 패전투수가 됐다. 데뷔 후 한 경기 최다 실점(종전 2006년 5월 17일 대구 두산전. 5실점)이었다. 사실 나도 놀랐다. 그러나 놀라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억지로라도 당시의 상황을 복기하고 또 복기했다. 변화? 마음가짐만 변했다. ‘더 정확하게, 더 세게’. 두 가지만 생각하고 마운드에 올랐다. 그렇게 시간이 또 흘렀고 시즌이 종료될 때 내 이름이 구원 부문 1위에 올라와 있었다.

2012년 11월 1일. 또 한 번 내가 춤을 춰야 하는 시간이 왔다. 이날만큼은 쑥스러울 필요가 없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흘러나왔고, 삼성 동료 전원이 말춤을 췄다. 한국시리즈 2연패. 또 우승을 확정하는 이닝을 내가 맡았다. “어서 이닝을 끝내고 동료들과 즐기자!”라는 생각뿐이었다.


오늘을 살고 내일을 준비한다

나는 오늘을 살고, 내일을 준비한다. 오늘 풀어지면, 내일은 두 배로 땀을 흘려야 ‘어제의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경기가 끝난 뒤에는 사실 쉬고 싶다. 하지만 내일을 생각하면 쉴 수가 없다. 나도 모르게 또 웨이트 트레이닝장을 향한다. 나는 마무리 투수다. 언제 등판할지 모른다. 일주일 내내 쉴 수도 있지만 3일 연속 등판해야 하는 때도 있다. 오늘 준비를 해야 내일 편안하게 던질 수 있다.

'오늘을 살고 내일을 준비한다'는 오승환 선수

사실 웨이트 트레이닝은 무척 고된 훈련이다. ‘그냥 열심히’가 아니라, 무엇 때문에 이 무거운 것을 들고 지겨운 동작을 반복해야 하는지 알고 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

중학교 때부터 웨이트 트레이닝에 힘썼다. 그러나 그땐 어렸다. “일단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다. 남들보다 오랜 시간을 웨이트장에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단국대에 입학해 수술을 받은 뒤부터 알게 됐다.

내 땀을 헛되게 하지 말자

정말 고된 시간이었다. 2001년 11월 12일 팔꿈치 인대접합 수술을 받은 뒤 오전 9시부터 밤 10시까지 재활 훈련을 했다. 오전에는 팔꿈치 보강 훈련을 집중적으로 했고 오후엔 어깨를 단련시켰다. 밤에도 웨이트트레이닝과 러닝을 통해 꾸준하게 근력을 향상했다. 5m에서 시작한 캐치볼이 10m•30m로 늘었다가 다시 줄어드는 일이 반복됐다. 하지만 나는 지치지 않았다. 그냥 열심히 가 아니라, 무엇 때문에 이 무거운 것을 들고 지겨운 동작을 반복해야 하는지 조금씩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런 걸 ‘체득’이라고 하는 걸까.

난 그냥 야구가 좋았고 하고 싶었다. 학교 운동장을 지나갈 때 공과 배트가 만드는 마찰음. 당장에라도 마운드에 서서 공을 던지고 싶었다. 경기가 열리는 동대문 운동장에서 들리는 함성은 나를 더 자극했다. 대부분 트레이너들이 경계하는 ‘앞서 나가는 마음’. 나도 위험했다. 공 대신 덤벨을 들었다. ‘더 길게, 잘할 수 있게. 나를 도와다오.’ 묵직한 느낌이 팔에 전해졌다. 상처 입은 팔과 마음에 새 살이 돋기 시작했다.  

단국대 3학년 때부터 드디어 마운드에 다시 섰다. 야구장이 아닌, 재활 훈련장에서 만든 기적이었다. 그 기적이 한 달•1년으로 끝나지 않게 나는 또 웨이트 트레이닝장을 찾았고 지금도 찾고 있다.

'난 그냥 야구가 좋았고 하고 싶었다'라고 말하는 오승환 선수

왜 해야 하는지, 즉, 웨이트 트레이닝과 투구에 대한 이론이 정립되면서 자세가 바로 잡혔다. 바른 자세로 훈련하니, 같은 양을 훈련한 선수들보다 효과가 컸다. 근육이 더 잘 자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깨 보강 훈련을 할 때, 자세가 나쁘면 다른 쪽 근육의 힘을 끌어다 쓴다. 정작 발달해야 할 어깨 근육은 자라지 못하고, 다른 근육에는 부상이 올 수도 있다. 후배들이 가끔 “웨이트 트레이닝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물을 때가 있다. 내 대답은 “정확하게 해.”뿐이다.  

투수들의 팔은 닮는다. 마치 분필과 같다. 내 팔도 닮고 있다. 그래서 오래 쓸 수 있는 더 강한 분필을 만들려고 한다. 2010년에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고 난 뒤 웨이트의 양을 줄인 적이 있다. 그래도 공은 가더라. 그런데 뭔가 마음이 불편했다. 팔이 더 강해지지 않은 기분이랄까. 다시 훈련양을 늘렸다.  

내 등판 결과는 팀의 승패와 직결된다. 나의 오른팔에 많은 시선이 쏠린다. 그래서 나는 오른팔을 ‘보조’해 줄 근육들도 단련한다. 이른바 채찍 이론이라고 한다. ‘손잡이로부터 시작된 힘이 줄기로 전달돼 끝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낸다.’ 하체와 몸통도 투수들에게 무척 중요한 부위다. 물론 팔에 가장 큰 무리가 간다. 그때 하체와 몸통의 도움을 받으면 팔은 덜 소비되고, 공의 무게감은 유지된다.

한국 마무리투수의 새 역사를 쓴 오승환 선수

웨이트 트레이닝을 많이 하면 ‘몸이 딱딱해진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쇠는 달굴수록 유연해지고, 결국 강해지지 않나. 나는 투수의 몸도 그렇게 보고 있다. 올해 훈련량이 꽤 많았다. 그리고 구속이 늘었다. 쉬고 싶은 마음을 줄이고, 훈련에 투자한 성과가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앞에서 전편에서 얘기했듯이 내가 ‘다시 던질 수 있을까?’라고 걱정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걱정을 억지고 떨쳐버리고 몸을 단련했다. 웨이트 트레이닝이 과하면 분명히 독이 된다. 사실 나는 아직 그 지점을 정확히 모르겠다. 그래서 조금 더 해봐야겠다. 아직은 그저 부족해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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