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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스포츠단] 프로야구 역대 최초 250세이브 달성! 오승환 선수의 My story 1편

안녕하세요. 삼성이야기 에디터, Sam입니다.

지난 7일, ‘끝판대장’ 오승환 선수가 프로야구 역대 최초로
개인 통산 250세이브라는 대기록을 달성했습니다.

한국 마무리투수의 새 역사를 쓰고 있는 오승환 선수!
그가 살아온 야구 인생에 대해 들어보았습니다.

삼성스포츠단 소속 선수의 과거와 현재, 꿈과 희망을 느낄 수 있는 시리즈 콘텐츠 ‘스타다이어리’를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가족들의 눈물이 나를 키웠다

아들아, 참 대견하다

아버지(오병옥 씨)의 한 마디.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228세이브(2012년 7월 1일 대구 넥센전). 사실 나는 평소처럼 공을 던졌고, 다행히 세이브를 기록했다. 다른 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개인 통산 250 세이브 달성한 삼성라이온즈 오승환 선수

개인 통산 최다 세이브에 대한 인터뷰가 길어져서 평소보다 늦게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다. 아버지도 무뚝뚝하신 편이다. 그런데 이날은 조금 더 감정을 드러내셨다. 그제야 ‘내가 기록을 세우긴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나다. 무뚝뚝한 아들. “아주 대단한 기록도 아니에요. 고맙습니다.” 살가운 아들이었다면 더 많은 말로 고마움을 표현했을 텐데… 그리고 어머니(김형덕 씨). 어머니는 분명히 울고 계셨을 거다. 내가 힘겨웠을 때도, 기록을 세웠을 때도 어머니는 남몰래 눈물을 흘리셨다.

늘 따뜻하신 나의 어머니. 속정 깊으신 아버지. 그리고 나를 위해 희생했던 두 형(오창훈•오형석 씨). 가족들의 눈물과 배려 속에 ‘야구 선수 오승환’이 탄생했고, 자라났다. 228세이브. 그 중 절반 이상의 ‘지분’이 가족의 몫이다. 나도 가끔은 게을러지고 싶다. 그러나 나를 위해 헌신해 준 가족들을 생각하면 어느새 내 몸은 뛰고 있다.

삼성라이온즈 끝판왕 오승환 선수

나는 ‘야구부가 없는’ 대영초등학교에 입학했다. 5학년 때 담임이셨던 김주성 선생님께서 ‘6학년 형들보다 멀리 던지는 내 팔’을 주의 깊게 보시고는 아버지를 만나 “야구를 시켜 보시죠”라고 권하셨다. 선생님께서 전에 있던 도림초등학교로 전학을 주선하셨고 그렇게 나의, 또 가족의 ‘야구 생활’이 시작됐다.

저도 야구를 해보고 싶습니다

단 한마디에 “그래, 한번 해봐라.”라고 믿어주신 아버지. 이후 늘 내가 출전하는 경기, 관중석에 아버지가 계셨다. 어머니는 늘 내 걱정 속에 지내셨다.

중학교 때 하루는 기합을 받고 들어온 일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께서 한숨도 못 주무신 얼굴로 “그렇게까지 힘들게 야구를 해야 하니. 그만해도 된다”고 하시더라. “어머니, 괜찮습니다.” 많은 말이 필요 없었다. 어머니는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그만하자”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지금은 참 무뚝뚝하지만, 어릴 때는 형들에게 장난도 많이 쳤다. 모든 남자 형제들이 그렇듯이, 형들이 나를 쥐어박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야구를 시작한 뒤로는 절대 내 몸에 손을 대지 않았다. 부모님의 일정부터 음식까지, 모든 게 내 위주였다. 따지고 보면 형들은 얼마나 서운했을까. 그러나 형들도 ‘막내 승환이부터’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삼성라이온즈 오승환 선수의 어린시절

단국대 1학년 때, 나는 오른 팔꿈치 인대접합 수술을 받았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 나는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가족들도 묵묵히 지켜봐 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의 눈물을 봤다. 그런 어머니를 아버지와 형들이 위로했다. ‘열심히 해야지. 꼭 성공해서 보답해야지.’ 나는 그렇게 통증을 눌렀고, 재활을 버텨냈다. 내가 삼성에 지명받던 날(2005년 2차 1라운드 전체 5순위), 가족이 모두 활짝 웃었다. 이 글을 보고 계신 분 중 혹 많이 힘들고 외롭다고 느끼는 분들이 있다면, 감히 꼭 하나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기억하세요.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누군가의 눈물이 당신을 키웠습니다

아마 이 사실을 깨 달고 있다면, 어떤 힘든 순간을 버텨낼 큰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둘째 형은 이미 결혼해서 아이가 있다. 큰 형도 작년 12월에 결혼했다. 나도 서른을 넘기면서 ‘결혼 언제 하나’라는 질문을 받는데 솔직히 아직은 계획이 없다. 난, 내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형들처럼.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배려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졌을 때, 그때 가정을 꾸리려고 한다.


그땐 그냥 던지고만 싶었다

작년, 한국 프로야구 최다인 228세이브를 달성하고 축하 전화를 참 많이 받았다. 누군가에게 축하를 받고, 소감을 밝히는 일은 여전히 낯설다. 주위에서 “좀 활짝 웃어라”라는 말씀도 하시는데, 어쩌겠나. 나는 그런 사람인걸. 그래도 최근에는 자주 웃는 편이다.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첫 250세이브 달성한 오승환 선수

‘던지고 싶다’는 생각만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웃으려고 해도 웃어지지 않았다. 정말 ‘투수’가 되고 싶었던 그때에는.

우신중학교 재학 시절, 나는 또래보다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였다. 최고 구속이 138㎞가 나왔다. 중학교 때는 130㎞만 넘어도 ‘빠르다’라는 소리를 듣는다. 강문길 감독님(현 대한야구협회 심판이사•전 단국대 감독)께서 중3 때 나를 보신 적이 있다. “너는 고교 졸업하면 바로 프로에 가겠구나”라는 말씀을 하셨다. 만약 그렇게 됐다면 어땠을까?

한서고에 진학했을 때도 난 ‘투수’로 주목받았다. 그런데 경기고로 전학한 2학년 때부터 내 오른팔에 이상 신호가 왔다. 공을 던질 때 오른팔이 ‘찌릿찌릿’했다. 그렇게 참고 견뎠는데, 3학년 때 마침내 탈이 났다. 팔이 아파서 도저히 공을 못 던질 수가 없었다. 프로구단 스카우트들에게 눈도장을 찍어야 할, 고3 수험생. 하지만 나는 시험도 치르지 못했다.

삼성라이온즈 오승환 선수의 학창시절

외야수로 뛰며 아쉬움을 달랬다. (김)상수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호타준족’ 소리를 좀 들었다. 고3 때 1번 우익수로 뛰면서 ‘미기상’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외야에 있을 때 난 하나도 기뻐하지 않았다. ‘나는 언젠가 무조건 투수로 뛴다’는 생각만 했다. 당시 우리 학교(경기고)의 에이스는 이동현(LG)이었다. 동현이 덕에 우리 팀은 황금사자기 우승을 차지했다. 마운드에서 강한 공을 뿌리는 동현이. 그가 참 부러웠다.

‘나는 투수다’라는 생각만 하면 뭘 하나. ‘던지지 못하는 투수’에게 관심 갖는 프로구단은 당연히 없었다. ‘대학에는 갈 수 있을까?’라는 걱정에 사로잡혔다. 그때 강 감독님을 다시 만났다. 3년 만에 만난 감독님은 “왜 네가 우익수를 보느냐”라고 깜짝 놀라셨다. “팔이 아파서 못 던지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해 버렸다.

강 감독님이 한참 뒤에 “너, 단국대에서 야구 해볼래?”라고 물으셨다. 다른 생각할 틈이 없었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강 감독님은 중3 시절의 내 공을 보고, 나를 스카우트 하셨다고 하더라. 3년 전의 가능성. 그걸 발견해 주신 감독님께 감사드린다.

의욕적으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수술 없이 재활만으로 공을 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내 인대는 이미 공을 던질 수 없는 상태였다. “조금 멀리 돌아간다고 생각하자.” 감독님 말씀에 2001년 11월 12일, 나는 수술대에 올랐다.(오른 팔꿈치 인대접합 수술)

몸에 칼을 댄다는 것. 그 두려움을 처음 알았다. 가끔 밀려오는 다시는 예전처럼 못 던질 수도 있다는 공포가 더 두려웠다. 오전 9시부터 밤 9시까지 빡빡한 재활 프로그램을 소화했다. 밤 9시 이후에도 달렸다. 강 감독님께서 “오늘은 그만 들어가서 쉬어라.”라고 말씀하셔도 “네”라고 짧게 대답하고 다시 뛰었다. 간절했다. 마운드와 공, 그리고 투수. 5m에서 시작한 캐치볼을 30m까지 늘이고도, 다시 통증이 오면 5m로 줄였다. 괴로운 일상이 반복됐다. 그때마다 생각했다.

나는 무조건 투수다

부상을 극복하고 다시 마운드에 선 오승환 선수

2003년 5월, 다시 마운드에 섰다. 140㎞.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기뻤다. 다시 재활군으로 간다고 해도, 또 재활하면 던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당시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구속이 점점 늘었다.

2004년에는 춘•추계 대회에서 총 6승을 거뒀다. 춘계대회에서 우수투수상을, 추계대회에서 최우수선수상을 받았다. ‘투수 오승환’이 처음으로 받는 상이었다. 아직도 그 트로피를 고이 간직하고 있다. “던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안겨준, 내게는 정말 소중한 상이다.

대학교 4학년이던 어느 날, 강 감독님이 “프로에서 관심을 보이는 것 같다. 힘내라”고 하셨다. 내게 희망을 주는 말씀이겠거니, 그저 감사히 넘겼다. 그런데 2차 드래프트 1라운드(전체 5순위)에서 삼성이 나를 지명했다. 내 팔이 아파져 올 때부터 근심이 사라지지 않았던 우리 집에, 웃음이 번져 나갔다. 투수 오승환. 제2막이 펼쳐지고 있었다. 두려움은 없었다. 설레기만 했다. 최소한 나는 이제 ‘던질 수 있는 투수’였다.

난 흔히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지 못했다. 오히려 스무 살, 어린 나이에 위기를 겪었다. 그런데 또 젊은 나이에, 새로 출발할 수 있는 계기를 맞이했다. 단지 우연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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