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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스포츠단] 삼성라이온즈 30년, 역사를 만들어 온 선수들! 1편

안녕하세요. 삼성이야기 에디터, Sam입니다.
프로야구 역사 만 30년,
그동안 많은 구단이 생기고 사라지고 이름이 바뀌었지만
삼성라이온즈는 굳건히 자리를 지켜왔는데요~

삼성라이온즈가 건재할 수 있던 이유,
우리를 울고 웃게 한 선수들을 통해 삼성라이온즈 30년 역사를 돌아봤습니다!

그 첫 번째 이야기, 함께 볼까요?


삼성라이온즈 30년, 역사를 만들어 온 선수들!

프로야구가 시작된 지 만 30년이 되었습니다. 30년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팀이 창단됐고, 이름이 바뀌었고, 사라졌죠. 원년부터 이름을 그대로 유지하는 곳은 두 팀뿐입니다. 그 중 한 팀이 바로 ‘삼성라이온즈’에요. 30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를 울리고 웃게 했던 삼성라이온즈의 선수들을 통해 ‘삼성라이온즈 30년 역사’를 돌아봤습니다.

삼성라이온즈 30년, 역사를 만들어 온 선수들!

소니를 제친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 프로야구에서 마저 삼성이 일본을 제쳤다

올 초입니다. 일본 오사카에서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 버펄로스의 시범경기를 취재할 때였습니다. 오릭스 구단 관계자는 한국야구 발전에 관련해 소회를 밝히다가 갑자기 소니와 프로야구 그리고 삼성을 동시에 언급했습니다. 일본야구인 가운데 대표적 ‘지한파’로 통하는 이 관계자는 고개를 갸웃하는 기자를 보고는 씁쓸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니는 일본 경제의 상징이다. 세계 최고의 가전업체였다. 하지만 지난해 한국의 삼성에 밀려 전 세계 TV 시장에서 2위로 떨어졌다. 일본인 모두가 상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프로야구도 마찬가지다. 2005, 2006년 코나미컵(아시아시리즈의 전신)에서 삼성은 일본 팀에게 연거푸 패했다.

당시 ‘삼성이 소니를 따라잡는 것보다 한국야구가 일본야구를 따라잡는 게 더 어려울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타이완에서 열린 아시아시리즈 결승전에서 일본시리즈 챔피언 소프트뱅크 호크스가 한국시리즈 챔피언 삼성 라이온즈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소니의 추락보다 더한 충격이었다


사실이었습니다. 2011년 일본은 소니의 추락에 놀랐고, 소프트뱅크의 패배에 가슴이 내려앉았습니다. ‘영원한 아성’이라 믿었던 두 분야에서 한국에 고배를 마신 까닭이었죠. 그것도 공교롭게 삼성에 당한 패배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패배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이미 예견된 것인지 몰랐습니다.

1982년 구단 창단 시 삼성은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 출신 야구인들에게 노하우를 전수받았으나, 그 해 요미우리 감독 출신의 나가시마 시게오는 이미 “한국 선수들의 가능성은 일본 선수들보다 뛰어나다”한국야구의 비약적인 발전을 예상한 바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지금. 삼성전자는 TV와 휴대전화 부문에서 세계 1위로 올라섰죠. 지난해엔 3D TV 시장에서 소니를 제치고,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가전업체로 등극했습니다. 야구에서도 그랬습니다. 아시아시리즈 결승에서 삼성은 소프트뱅크를 꺾으며 아시아 최고의 야구팀으로 도약했어요. 올 초 일본 오키나와에서 열린 연습경기에서도 일본 팀들은 삼성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삼성 라이온즈의 창단 30년사를 돌아보는 건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삼성의 구단사가 곧 삼성전자 아니 한국의 발전상을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대기업 가운데 가장 먼저 프로야구 창단을 발표했던 삼성

1981년 정부는 주요 스포츠의 프로화를 꾀했습니다. 야구와 축구가 대상이었죠. 하지만 프로야구단 창설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기업은 많지 않았습니다. ‘전체 그룹의 종업원 수가 3만 명 이상의 대기업이어야 한다’는 정부의 프로야구단 선정 기준을 충족하는 기업이 많지 않은 까닭이었습니다.

MBC가 일찌감치 창단을 발표했으나, MBC는 종업원 수가 턱없이 모자랐고, 두 번째로 창단을 약속한 롯데 역시 당시만 해도 재계순위 49위의 고만고만한 회사였습니다. 대기업의 창단 의사가 나오지 않자 정부는 과연 ‘프로야구 출범이 가능할까?’라는 회의론에 빠졌습니다. 이때 가장 먼저 프로야구단 창설 의사를 밝힌 대기업이 바로 삼성이었어요.

대기업 가운데 가장 먼저 프로야구 창단을 발표했던 삼성

삼성은 “프로야구를 통해 국민에게 건전한 오락과 화제를 제공하자”는 정부의 취지에 적극 공감하며 대구·경북을 연고지로 하는 프로야구팀 창설을 발표했습니다. 이윽고 삼성은 1981년 12월 14일 6개 구단 가운데 가장 먼저 ‘삼성 라이온즈’이라는 이름으로 프로야구팀을 발족시키며 야구 붐 조성에 앞장섰습니다.
프로야구 출범을 주도했던 전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차장 이호헌 씨는 “삼성의 참여가 프로야구 출범에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털어놨습니다.

삼성의 창단 발표가 있었기에 OB, 삼미, 해태 등이 안심하고 프로야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정부 역시 ‘삼성이 중심에 있으니까 프로야구가 갑자기 사라질 일은 없을 것’이라는 안도감을 느꼈다. 만약 삼성이 참여하지 않았다면 프로야구는 출범도, 출범했다손 쳐도 31년 동안 리그를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1982년 2월 3일 열린 삼성 라이온즈 창단식

1982년 2월 3일 열린 삼성 라이온즈 창단식은 그야말로 별들의 집합이었습니다. 코칭스태프부터 남달랐는데요, 서영무 감독은 1970년대 경북고 전성시대를 이끈 ‘대구·경북야구의 대부’였습니다. 고교 감독 시절 전국대회에서 22회나 우승을 경험한 건 서 감독이 유일무이했습니다. 임신근, 우용득 코치 역시 경북고, 대구상고 출신의 명투수·명포수로 실업야구에서 이름을 날렸던 이들이었죠.

삼성 선수들은, 전원이 국가대표급 스타들

특히나 창단식에 참가한 22명의 삼성 선수들은, 전원이 국가대표급 스타들이었는데요, 당시 최고 강속구를 자랑하던 좌완 이선희와 권영호, 우완 정통파 황규봉, 성낙수는 대표팀의 에이스들로 일찌감치 유명세를 타던 이들이었습니다. 포수 이만수와 손상득 역시 국가대표 안방마님으로 ‘최고의 포수’라는 평을 들었습니다.
더 놀라운 건 내·외야수들이었어요. 배대웅, 함학수, 서정환, 오대석, 천보성, 김한근, 박정환, 정현발은 실업야구에서 두터운 팬을 확보한 국가대표 야수들로, 야구전문가들은 이런 삼성을 가리켜 “국가대표 라인업”이라며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최초의 삼성 스타, 이선희와 이만수

삼성의 국가대표급 선수들 가운데 가장 주목받은 이는 투수 이선희와 타자 이만수였습니다. 당시 이선희는 ‘일류기업 삼성’의 이미지 그 자체였고, 이만수는 ‘라이온즈 공격야구의 상징’이었죠.

일본킬러로 명성을 날린

이선희는 아마추어 시절 ‘일본 킬러’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1977년 니카라과 대륙간컵에서 다승왕, 구원왕, 대회 MVP에 오르며 한국야구의 세계대회 첫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이선희만 마운드에 오르면 헛방망이질을 연발했는데요, 1980년 도쿄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도 이선희는 일본 타선을 잠재웠고, 이때부터 일본은 한국 좌완투수에게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냈습니다. 지금은 삼성전자가 일본에 있어 거대한 벽이지만, 당시로선 이선희가 일본엔 공포의 대상이었던 셈입니다.
이선희는 1982년 프로 첫 시즌에서 15승 7패 평균자책 2.91을 기록하며 ‘일류선수’다운 면모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MBC와의 개막전에서 이종도에게 끝내기 만루홈런을 맞고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도 OB 김유동에게 또다시 쐐기 만루홈런을 맞으며 이선희는 ‘일본 킬러’에서 ‘비운의 투수’가 됐습니다. 현재 이선희는 삼성 스카우터로 활약하며 ‘제2의 이선희’를 발굴하고자 전국을 돌고 있습니다.

이만수는 삼성 야구를 '재미나고 화끈한 야구’로 인식시킨 인물

이만수는 삼성 야구를 ‘재미나고 화끈한 야구’로 인식시킨 인물입니다. 한양대 출신의 이만수는 1982년 MBC와의 개막전에서 프로야구 첫 안타와 첫 홈런을 몰아치며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프로야구 통산 1호 기록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특히, “나무배트로는 많은 홈런을 칠 수 없다”는 편견을 깨고 1982년 7월 10일부터 15일까지 4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하는 괴력을 과시했답니다. 이는 프로야구 최초의 기록이자 야구팬들이 홈런에 열광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이만수는 1983년 정규 시즌 MVP를 수상한 이후, 1984년 타율왕·홈런왕·타점왕에 동시에 오르며 프로야구 최초의 타격 3관왕에 등극합니다. 1985년에는 홈런왕·타점왕을 거머쥐며 삼성의 전무후무한 전·후기 통합우승을 이끌었습니다. 이만수는 1997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기 전까지 개인통산 252홈런을 기록하며 ‘한국의 베이브 루스’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MBC 허구연 해설위원은 그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루스의 홈런이 메이저리그 발전을 이끌었다면 이만수의 홈런은 프로 스포츠가 뭔지 모르던 한국 스포츠팬에게 프로야구의 재미를 일깨운 소중한 장면으로 작용했다. 이만수를 중심으로 펼쳐진 삼성의 공격야구는 투수력에 의존하던 기존 한국야구의 패러다임을 한순간에 바꿔 버리며, 야구팬들 사이에 ‘야구는 재밌는 것’이란 인식을 심어 줬다

이는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갤럭시S’가 통신기로서의 휴대전화를 ‘재미나고, 유용한 놀이기구’로 진화시키며 통신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꿔 놓은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헐크’란 별명으로 많은 야구팬을 확보했던 이만수는 현재 SK 감독으로 활약 중입니다.


삼성의 히트 상품, 김시진과 장효조

이선희와 이만수가 이끌던 삼성 야구는 1983년 국가대표 에이스 김시진과 ‘타격 천재’ 장효조가 입단하며 더 강해졌습니다.

삼성의 새로운 에이스 김시진

김시진은 특급 투수답게 입단 첫해 17승 12패 평균자책 2.55를 거두며 삼성의 새로운 에이스로 떠올랐습니다. 1985년엔 25승을 올리면서 재일교포 투수 김일융과 함께 삼성 역사상 최초로 다승왕의 주인공이 되었죠. 김시진의 맹활약이 없었다면 이해 삼성의 통합우승은 어려웠을 것이라는 게 야구전문가들의 중평입니다.
김시진은 이후로도 선발투수의 상징이 됐습니다. 프로야구 사상 첫 100승의 주인공도 다름 아닌 김시진이었어요. 김시진은 1988년 11월 롯데로 트레이드 되기 전까지 6년간 삼성에서 뛰며 111승 49패 16세이브 평균자책 2.73을 기록했습니다.

타격 천재라고 불린 장효조

장효조 역시 김시진처럼 프로에 데뷔하자마자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그 해 타율 3할 6푼 9리로 타율왕에 올랐고, 장타율과 출루율에서도 1위를 차지했습니다. 특히나 1983년 5월 10일부터 15일까지 8연타석 안타와 3연타석 홈런을 동시에 기록하며 ‘역시 타격 천재’라는 소릴 들었죠. 3연타석 홈런은 2000년 현대 박경완이 4연타석 홈런을 기록하기 전까지 17년 동안 깨지지 않았고, 8연타석 안타는 2004년 SK가 김민재가 9연타석 안타를 치기 전까지 21년간 불멸의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장효조는 1985년부터 1987년까지 3년 연속 타율왕에 올랐고, 1989년까지 데뷔 이후 7년 연속 타율 3할을 기록했습니다. 1987년엔 타율 3할 8푼 7리로 정규 시즌 MVP에 오르는 감격을 누렸습니다. 삼성 최고의 히트상품이었던 장효조는 그러나 김시진처럼 라이온즈 유니폼을 중도에 벗어야 했습니다. 1988시즌이 끝나고서 롯데로 트레이드된 것입니다.
김시진과 장효조의 트레이드는 표면적으론 ‘큰 경기에 약하다’는 평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실제로 두 선수는 해태와 맞붙은 1986, 1987년 한국시리즈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는데요, 김시진은 두 번의 한국시리즈에서 승 없이 5패, 장효조는 타율 2할 1푼대의 빈타에 허덕였습니다.
당시 삼성팬들은 두 선수의 트레이드에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하지만 1985년 통합우승 이후 한 번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지 못한 삼성은 이름값에 의존하는 ‘양(量) 경영’에서 철저히 실력을 바탕으로 하는 ‘질(質) 경영’으로의 전환을 선언하며 트레이드를 강행했죠.
1993년 이건희 회장이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며 대대적인 그룹 개혁 작업에 착수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라이온즈는 3년 후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기 시작한 모그룹과는 달리 2001년까지 한국시리즈 우승이란 대업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현재 김시진은 넥센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고, 장효조는 삼성 2군 감독으로 활약하다 2011년 위암으로 타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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