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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앤유] 소설 은교의 작가 박범신이 생각하는 젊음이란?

안녕하세요. 삼성이야기 에디터, Sam입니다.

스스로 ‘위태롭게 젊다’고 말하는 작가 박범신.

그가 생각하는 젊음은 무엇인지,

그리고 현장을 떠나 ‘불편한 고향’으로 간 이유는 무엇인지

삼성앤유가 만나봤습니다.

※ 아래 글은 삼성앤유에 소개된 컨텐츠를 블로그용으로 수정한 글입니다.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깝다, 소설가 박범신

글 최태원, 사진 장석준

소설가 박범신이 고향인 충청남도 논산으로 낙향했습니다. 대개 낙향은 은퇴 후 선택이기 쉽습니다.
 하지만 항상 ‘현역’이고 싶은 그의 낙향은 은퇴와 무관합니다. 현역인 그가 현장을 떠나 ‘불편한 고향’으로 간 건 왜일까요? 내리던 눈이 몰래 비가 되던 겨울 어느 날 논산 집필실을 찾아 박범신의 반나절을 훔쳤습니다.

소설 은교의 작가 박범신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청년작가’로 불리는 박범신. 그는 자신의 이름을 70대에서 20대 독자까지 두루 유포한 이 시대 보기 드문 소설가다. 꽃다운 시절 <풀잎처럼 눕다>를 읽었던 할머니, 그리고 그녀의 손자가 <은교>로 작가를 만나고 있으니 최소한 삼대에 걸쳐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셈이다. 1970년대 서점가의 아이돌이었던 그가 21세기 서점가 중심에 있다는 건 중견의 허릿심마저 빠진 우리 문단 현실에선 이례적 사건일 것이다. 하지만 세월의 담을 넘어 인기작가 대열에서 낙오하지 않은 것보다 더 그의 이름이 신선한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지난 2005년, 한 포털사이트에 소설 <촐라체>가 연재됐고 작가는 박범신이었다. 사람들은 ‘우리가 아는 그 박범신인가’하고 의아해했다. 기성문단 작가가 인터넷에 작품을 연재한 전례가 없었고 인터넷 소설은 저급하다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왜 안 말렸겠어요. 그런데 주변의 우려라는 게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댓글을 어떻게 할 거냐, 쓰레기 같은 인터넷 공간에 왜 자처해서 뛰어드느냐는 거였어요. 해서 제가 그랬죠. 작가 입장에서 문예지에 글을 쓰거나 인터넷에 쓸 때 같은 태도를 갖지 않느냐, 그러니 문제 될 거 없다고. 그들 말대로 인터넷이 쓰레기통이라면 내가 쓰레기를 치우면 된다는 생각으로 연재를 시작했어요.”

소설 은교의 작가 박범신

그는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편이라고 했다 낯선 걸 두려워하는 건 스스로가 늙었다고 제 발로 무덤에 들어가는 격이라고도 했다

육필원고로 디지털 등정에 오르다

노래방에서 소녀시대 신곡을 뽕짝 그루브(Groove)로 승화하며 후배에게 지청구를 자청하는 그는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편”이란다. 낯선 걸 두려워한다면 “스스로가 늙었다고 제 발로 무덤에 들어가는 격”이라고도 했다. 인터넷 연재 역시 그런 모험심이 작동한 결과였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소설가는 신문연재로 밥을 지었다. 인터넷 연재는 인터넷에 밥그릇을 뺏긴 후배들에게 인터넷으로 새로운 지면을 만들어주자는 선배의 배려였다. 인터넷 연재소설 개척자였으니 그가 얼리어답터쯤 된다고 생각하면 오판이다. 누적 방문자 수 100만 명을 돌파했던 <촐라체>는 200자 원고지에 꾹꾹 눌러 쓴 육필 원고였다. 묘하게도 디지털은 아날로그와 결합했을 때 파괴력이 커진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 시켜준 일이었다.

작업 공정만 아날로그적이었던 게 아니다. 에베레스트 서남쪽 6,000m 고지에서 실족한 형제를 통해 두 인간의 초상을 그린 <촐라체>는 인터넷 감각을 벗어난 무겁고 클래식한 작품이었다. 그는 가볍고 말초적인 방식을 피해 인터넷 공간을 공략했고 개척과 동시에 좋은 선례까지 남겼다.
 스스로 “위태롭게 젊다” 말하는 작가는 지난 2010년엔 소설 <은교>로 다른 등정 루트를 개척했다. 대척점에 있다고 생각해온 종이책과 전자책을 동시에 출간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보통 전자책은 종이책 수명이 다할 때쯤 내는 것이란 통념도 깨졌다. 직접 출판사 사장을 설득해 성사시킨 일이라니 작품뿐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태도 역시 아직 젊은 그다.

대중과 기득권의 함정에서 벗어나려 한 절필 선언

오랜 시간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타이틀은 마치 접두사처럼 박범신의 이름 앞에 따라붙었다. 그가 대중의 심리를 꿰뚫어 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얼까? 영업비밀이 아니라면 공개해달라는 농 섞인 질문을 던지자 “솔직히 대중이 누구인지조차 잘 모른다”는 답이 돌아온다. “다만 제가 그 속에 있다고 생각할 뿐이죠.
 한 번도 대중을 통찰하고 그들의 심리를 간파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적은 없어요. 그건 위험한 생각 아닌가요?”
 대중의 심리를 잘 모르겠다고 했지만 그의 작품이 지속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는 분명하다. 소설을 통해 교훈이나 이데올로기를 강요하지 않아서라는 평가에 대해서도 그는 “왜 내 안에 습관화된 계몽성이 없겠는가”라며 “단지 평생 싸워왔고 지금도 그 과정에 있다”고 한다. 누군가를 가르치려는, 내재된 계몽성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 아직도 전의를 잃지 않고 전투 중이라는 노병(老兵)의 발언이 큰 울림이 되어 돌아온다.


어떻게 보면 작가는 늘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시선으로 독자와 만나고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의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다. 지난 1993년 많은 독자에게 충격을 안겨준 ‘절필 선언’ 역시 창작의 고단함 탓이었다.
 “등단 이후 쉬지 않고 줄곧 달렸으니 상상력도 고갈됐었고 50줄을 바라보는 나이가 주는 고통 같은 개인적 고민도 겹쳤죠.”

외적인 이유도 있었다. 지금도 자신에게 ‘문학 순정주의’가 있다고 말하는 작가에게 당시는 견디기 힘든 시기였다. 자유를 억압하는 정치적 환경에 반역하고 싶었고, 그런 정치로 인해 생긴 이데올로기 트렌드에도 저항하고 싶었다. 존재론적 번민과 사회와 문단으로부터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그는 절필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말았다.


”인기작가라는 타이틀은 작은 기득권과 그보다 더 많은 오해를 사게 됩니다. 배를 덜 곯는 기득권 뒤엔 독자의 오해가 도사리고 있죠. 독자는 인기 있는 작가를 자신이 생각하는 틀에 가두고 예단해버리거든요. 게다가 그 하찮은 기득권에는 관성이 있어서 작가의 상상력을 박제하고 함정에 빠트립니다.” 개인적 번민이나 사회적 스트레스는 그렇다손 치고 독자와도 불화를 겪어야 했다니 이래저래 작가는 불화 속에 살아야 하는 운명인가 보다. 끈질긴 기득권의 꼬리를 자르고자 결국 그는 자신을 유배하기에 이른다. 가족과 떨어져 용인으로 내려가 어설픈 농사꾼으로 지내며 3년이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소설 은교의 작가 박범신

인기작가라는 타이틀은 작은 기득권과 그보다 더 많은 오해를 사게 됩니다 배를 덜 곯는 기득권 뒤엔 독자의 오해가 도사리고 있죠

쓰지 않고서는 살 수조차 없었다

글쓰기 밖에는 해온 것이 없던 사람이 한순간에 붓을 내려놓자 극심한 금단 현상을 겪어야 했다. 밤새 산속을 헤매다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 절벽을 굴렀고 날이 밝으면 엉뚱한 동네로 하산하는 일이 잦았다. 그렇게 1년을 보냈다. 그러다 남새밭에 앉아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문장을 만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쓰지 않고서는 살 수조차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 시절을 두고 “기득권은 세상을 왜곡돼 보이게 하는 유리창 얼룩 같은 것이었고, 그 시간 동안 얼룩을 지우느라 애썼다”고 회상했다. 용인 외딴집을 둘러싼 자연이 치유의 축복이었다고 말하는 그는 상상력의 우물이 가득 차 넘치기 시작하자 <흰소가 끄는 수레>란 작품집을 들고 복귀했다.

자신을 예단하는 독자들로부터 잊히기를 기대하며 형벌 같은 칩거 시간을 보낸 작가 박범신. 그 시간을 경계선으로 그의 작품세계는 전혀 다른 구도로 짜였다. 이전 시기가 사회현상이나 세태를 받아쓴 시간이었다면 이후엔 존재의 근원적 질문에 답하는 시간이었다. 그는 이후 출간된 <촐라체>와 <고산자> <은교>를 두고 ‘갈망 3부작’이라 지칭했다. 불멸과 사랑, 신과의 관계를 이룰 수 없는 ‘갈망’이라고 설명했다.


“제 소설의 적정 독자는 3만에서 5만 명 정도라고 생각해요. 쓸쓸하거나 외롭지 않은 숫자거든요. 그런데 <은교>는 영화 때문에 더 나갔어요. 그랬더니 역시 대중의 오해가 생기더군요. 읽지 않고 읽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은교>를 노인과 소녀의 스캔들 정도로 치부하는 거죠. 실은 늙어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의 처절한 슬픔을 얘기하고 있는데 말이죠.”

박범신 작가 작품

젊음은 미모와 무관하게 광채가 납니다.
물론 젊은 시절 나도 그랬듯 그들에겐 보이지 않는 절대적 아름다움이죠

스무 살 언저리에 살고 있는 작가 박범신

얼마 전까지 교수였던 그는 대학에는 두 개의 시계가 있다고 했다. 한없이 흘러가는 교수의 시계와 청춘에 시침이 고정된 제자의 시계가 있다고. 그 이중적 공간에서 ‘때론 확, 재를 뿌려버리고 싶을 만큼 부러운 젊음’을 지켜봐야 했던 작가는 스트레스가 극심했던 모양이다. 1년 6개월 만에 <은교>를 썼으니 말이다. 이후 “조금은 젊음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말하는 박범신.

그가 생각하는 젊음이란 무엇일까? “젊음은 미모와 무관하게 광채가 납니다. 젊은 시절 나도 그랬듯 그들에겐 보이지 않는 절대적 아름다움이 있죠.”
 철학자 앨프리드 화이트헤드가 ‘청춘은 아직 비극에 물들지 않은 생명이다’라고 간파한 시기가 73세고, 시간이 훼손 시킬 수 없는 대상 ‘은교’를 탄생 시킨 박범신 작가가 60대인 걸 보면 청춘은 젊은이의 것이 아니라 늙은이의 눈에만 보이는 그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청춘에 대해 길고 단호하게 얘기하던 그가 한숨을 섞어 말했다.
 “나이는 자꾸 들어가는데 감성이 아직도 스무 살 언저리에 쳐져 있어요. 그럴 때면 내 안에 예민한 짐승 한 마리가 살고 있나 싶죠.” 나이를 못 따라오는 걸음 느린 젊은 감성은 청년 작가에겐 축복일 것이다. 물론 인간 박범신에겐 불편함이겠지만···.


그는 지금 스스로 각성시키기 위해 두 번째 유배지에 살고 있다. 아직 짖을 줄도 모르면서 덩치만 산만한 어린 백구 ‘산’이와 그는 논산의 밤을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아마도 40년 묵은 ‘생각 의자’에 앉아 세상을 벗어난 자신을 잠자코 응시하고 있을 것이다.

박범신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여름의 잔해>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 <죽음보다 깊은 잠> <풀잎처럼 눕다> 등을 발표하며 이름을 알렸다. 베스트셀러 작가로 왕성한 집필 활동을 보이던 중 1993년 돌연 절필을 선언하고 성찰과 사유의 시간을 보냈다. 1996년 작품활동을 재개해 인터넷 연재소설 <촐라체>와 내밀한 욕망의 근원을 주제로 한 <은교>를 발표하는 등 매체와 주제의 장벽을 허물며 ‘영원한 청년작가’로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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