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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앤유] 국내여행지 추천! 추억을 만날 수 있는 대구골목 여행

안녕하세요. 삼성이야기 에디터, Sam입니다.

가끔은 옛 정취가 살아 있는 골목으로 떠나고 싶지 않나요?

노른자가 둥둥 떠있는 쌍화차가 나오는 다방과

나무로 된 진짜 스피커를 가진 음악감상실이 있는
대구 골목 여행을 
Sam과 함께 떠나요~!

※ 아래 글은 삼성앤유에 소개된 컨텐츠를 블로그용으로 수정한 글입니다.


대구 골목 탐방: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골목 어귀에 서서

글 정윤수(문화칼럼니스트)   
사진 김진호·이호승    일러스트 이누리


도시는 거대해지고 인간은 왜소해집니다. 여기 이곳 대구의 겉모습 또한 그러합니다. ‘발전’이라는 이름의 수많은 약속이 번잡한 동대구역에서 번화가인 반월당 지하상가까지 가득합니다.
그 아래로 지나가는 사람의 왜소한 모습은 다만 차디찬 겨울 날씨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는 어떤 확신을 얻기 위해 대구 옛 길을 걸어봅니다.

‘근대골목’이라고도 하고 ‘진골목’이라고도 하고 ‘약전골목’ 혹은 ‘읍성골목’이라고도 하는, 대구 옛길이 얽혀 있는 그곳으로 들어서자마자 시간의 축이 완만하게 과거로 회전한다. 크고 작은 가게로 인해 가만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저 그런 대도시의 상업지구 같은 느낌이지만, 이미 1800년대 말에서 1900년대 초 대구지역 문헌지에 ‘진골목’이라는 명칭이 기록되어 있을 만큼 유서 깊은 곳이다.

여기서 ‘진’은 ‘긴’이라는 단어의 경상도 고향말이다. 이로부터 경상감영공원 부근까지 대구의 근대를 만날 수 있다. ‘감영’이란 말은 조선시대 각 도의 관찰사가 거처하고 집무하는 관청을 일컫는다. 조선시대 감영은 전국에 모두 여덟 군데가 있었는데 경상도의 경우 원래 상주에 있던 감영을 1601년에 대구로 옮겼다. 대구 사람의 은근한 자부심은 바로 이 400여 년의 역사에서 비롯한 것이며, 특히 감영을 중심에 놓고 있는 진골목 일대의 단아하면서도 기품 있는 자부심의 근거 또한 이로부터 연유한다.

골목 문화를 지키는 사람들 1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 ‘미도다방’

“어르신들은, 뭐랄까예 다들 외로우시지예. 그분들 그래 오시면 말벗 해 드리고 안부 여쭙고, 그게 다지예. 그래도 그런 정이 소중해서 날마다 어르신들이 찾아오시고예.” 미도다방 정인숙 씨의 말이다.


미도다방은 옛날 다방 행색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노른자 알맞게 들어 간 따끈한 쌍화차도 있는 곳이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있고 사람들 사이의 대화가 있다. “자주 오시던 분들이 며칠이고 소식이 뜸하면 걱정이 앞서지 예. 그러다가 어르신이 나타나시면 친정아버지 만난 것처럼 그렇게 반가 울 수가 없습니더.

“
하루 평균 400여 명이 찾는 미도다방의 ‘영업 비결’은 바로 이렇게 ‘영업’ 은 뒤로 하고 사람부터 생각하는 마음이다. 미도봉사회를 만들어 어려운 사람을 돕거나 5월이면 어르신들을 위한 선물이나 잔칫상을 차리는 일도 그런 마음 때문이다. 미도다방은 옛날 다방의 겉모습만 유지하고 있는 곳 이 아니라 그 시절의 따뜻한 마음까지 간직하고 있다.

시간의 축을 따라 과거로 가다

진골목 입구에서 먼저 눈에 띄는 곳은 2층 ‘양옥’으로 지어진 ‘정소아과의원’이다. 20세기 후반 현대사에서 양옥이 가진 의미는 각별하다. 박완서나 오정희의 소설에 엿보이는 풍경들, 그러니까 그 시절 서울이나 인천 혹은 춘천이나 대구 같은 도시의 유서 깊은 골목에 당당히 들어서 있던 양옥은 부와 문화의 랜드마크였다. 정소아과의원 건물은 주변에 난립한 고층 빌딩으로 인해 조금은 퇴락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단아한 풍채에서 한국전쟁과 산업화와 민주화와 또 수많은 변화를 견뎌낸 대구 사람의 기운을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

골목을 장식한 계산성당 모자이크 벽화

이 양옥을 기점으로 진골목과 약전골목 일대에 김원일의 소설 <마당깊은 집>의 실제 배경인 집이 있고 시인 이상화의 고택이 있고 일제 시대 민족운동가였던 서상돈의 집이 있으며, 또한 그 밖에 여러 근대 건축물이 여전히 버티고 서 있다.

골목에서 만난 몸과 마음의 안식처

진골목은 곧 약전골목으로 이어진다. 조선 효종 때부터 봄가을로 약령시가 열렸던 곳이다. 지금은 한약재 시장의 중심이 인근 영천 쪽으로 많이 기울었지만 그래도 약전골목 곳곳에 은성했던 과거를 되새겨주는 풍경이 여전히 남아 있다. 오후가 되자 오전의 쌀쌀했던 날씨가 조금씩 풀리면서 흡사 부침을 거듭했던 약령시의 역사가 그러했듯 금세 약재상과 한의원과 도매시장으로 사람들이 드나들기 시작한다. 약령시의 오전과 오후는 작지만 깊은 골목의 역사를, 나아가 대구의 역사를 함축해 보여주는 듯하다.


4. 시인 이상화 고택 내부  5. 약전골목의 청도한약방 모습 6. 계산성당의 고풍스러운 내부 7. 대구 골목에서 만나는 평범한 일상 8. 근근이 명맥을 잇고 있는 헌책방

약령시 끄트머리에 제일교회 구당이 있고 몇 걸음 못 미쳐 계산성당이 나타난다. 이러한 위용, 이 같은 영화, 이 같은 유서는 골목 일대가 대구 역사 문화의 중심이자 경상북도 일대의 정신적 저장고라는 점을 웅변한다. 이 건축물들은 식민지 치하의 피폐함이나 전쟁통의 정신적 위기를 든든히 버텨주었다. 이는 특정 종교의 내면화와는 무관하다. 제일교회 구당이나 계산성당은 특정 종교의 한 시설이 아니라 대구·경북의 정신문화유산으로서 충분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더욱이 오늘날처럼 희뿌연 상혼이 인간의 여린 내면을 뒤흔들어놓는 시절이고 보면 이러한 종교 건축물은 온갖 번잡한 얘기에 시달리는 도시인에게 아늑한 정신적 위안처가 된다.

청라언덕에 자리한 선교사 주택

1919년 3·1 만세운동의 기억을 저장하고 있는 90계단을 거쳐 청라언덕으로 올라가 본다. 동산의료원 선교사 주택 부지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누구나 음악시간을 통해 한 번은 입으로 불러보고 그리하여 마음 깊은 곳에 저도 모르게 저장시켰던 가곡 <동무생각>의 바로 그 ‘청라언덕’이다. 비록 엄동에 설한이 내린 차가운 날씨지만, 이 언덕에 올라 대구의 오래된 동네를 내려다보면 누구라도 자연스럽게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라는 노랫말이 떠오른다. 이것은 거의 문화적 원형질에 가까운 원체험이다. 이는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 같은 동산, 이 같은 동네, 이 같은 정경을 마음속에 한 줌씩은 다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마음속 풍경을 순식간에 떠올려주는 이 야트막한 언덕의 아름다움에 의해 저마다 유년 시절로 귀향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 청라언덕에는 작곡가 박태준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어 이 일대의 청순했던 옛 시절을 환기시켜준다. 2012년 대구문화재단은 작곡가 박태준의 삶과 음악을 바탕으로 한 음악극 <박태준과 청라언덕>을 바로 이 청라언덕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이런 작업은 매우 소중하다. 과거의 문화유산이 오늘에도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 자체도 소중하지만, 이를 신선한 감각과 새로운 해석으로 담아내는 문화적 작업을 함께 진행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래야 문화유산이 옛 기억의 박제품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골목 문화를 지키는 사람들 2

역사가 켜켜이 내려앉은 ‘제일교회’

약전골목의 상징인 제일교회 구당에서 만난 우제오 씨는 진골목에서 약전골목에 이르는 중요한 문화유산들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줬다. 교남 YMCA는 일제강점기 때 ‘대구 3·1만세운동’ 지도자들이 공부하고 일을 도모했던 곳으로 대구 민족운동의 중심지였다.

그것을 골목 사람들이 다시 살리는 중이었다. “저는 이 골목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안 어르신들이 모두 한의원에서 일하셨죠. 소설 <마당깊은 집>의 실제 장소도 제가 어릴 때 함께 놀던 친구네 집이었습니다. 이렇게 교회를 비롯해서 옛 건물이 버티고 있으니까 골목이 죽지 않게 된 것이죠. 젊은 학생이나 역사 동아리 회원이 쉬지 않고 찾아옵니다.” 지금 그는 제일교회의 크고 작은 일을 기록하고 사진으로 남기는 일을 하고 있다. 교회 안의 작은 일상이 쌓여 기록이 되고 역사가 된다. 1937년, 5층 높이의 종탑까지 세우며 들어선 이 교회 건물은 중세 고딕양식이 제대로 구현된 의연한 근대 문화유산이다.


골목이 살아 있는 풍경

청라언덕에서 진골목과 약령시 일대를 내려다본다. 이윽고 저녁에 이르러 하나둘 불이 밝혀지면서 골목은 대낮의 추위마저 잊은 듯 갑자기 활기를 되찾는다. 눈길을 더듬어 낮고 깊은 골목 어귀에 위치해 있는 시인 이상화의 고택을 생각한다. 도시문화학자 제인 제이콥스는 미국의 대도시가 초고층 빌딩으로 장악되는 것에 맞서 뉴욕의 다양한 인종이 빚어낸 다채로운 거리와 골목을 지켜낸 바 있다. 그녀는 저서 <대도시의 삶과 죽음>에서 ‘어떤 불은 밝게 빛나고 어떤 불은 서서히 꺼져 간다. 크든 작든 간에 각각의 불은 주변의 암흑에 빛을 퍼트리며 이런 식으로 하나의 공간을 만들어낸다’고 썼다.

골목을 장식한 계산성당 모자이크 벽화

만약 제인 제이콥스가 청라언덕에서 대구의 옛길과 골목을 내려다본다면 틀림없이 흐뭇해할 것이다. 획일화되는 거대한 도시가 아니라 거리와 골목이 살아 있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이 골목이 근세기 대구의 가장 부유한 동네였다는 점, 약령시라든가 그 밖의 집산물로 은성한 시장까지 열렸다는 점, 그리하여 지금도 골목 도처에 옛 영화를 되살려주는 표지가 적지 않다는 점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이곳에서 시인이 태어나고 자랐으며 이 골목 사람들이 그것을 기억하기 위해 고택을 복원해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골목에 시인이 있어 문향이 그윽했음을 웅변하고 있으니 이러한 유산이야말로 주변 전체를 에워싸고 있는 높은 빌딩이나 백화점보다 골목을 훨씬 값지게 만들고 있다.

골목 문화를 지키는 사람들 3

시들지 않는 아날로그 정신 ‘녹향’

오래된 LP와 오디오는 60여 년 역사의 음악감상실 녹향을 말해준다. 요즘 세련된 카페에서는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아우라다. 1946년 대구에 처음으로 클래식 음악감상실을 열고, 그 어려웠던 전쟁과 궁핍의 시절에 도 10여 차례 이사를 하면서 60여 년 음악문화 외길을 지켰던 이창수 선생은 지난 2011년 10월에 타계했다.


이로써 녹향의 역사는 끝이런가. ‘천만에’라고 대를 이어 음악의 본향을 지키고자 하는 아들 이정춘 씨는 힘주어 말한다. “이곳은 하나의 역사입니다. 부친께서 처음 시작하셨을 때부터 <가고파>를 작곡하신 김동진 선생, 시인 유치환 선생과 신동집, 양명문 선생, 소설가 최정희 선생 등이 이 곳을 안식처로 삼으셨고 그 이후로도 대구 문화의 터전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예육회 회원이 들어섰다. 1945년 대구 지역에서 최초 로 결성된 예술가 단체인 예육회는 쉼 없이 녹향을 문화의 산실로 만들어 왔다. 사람 사이의 직접적인 교감을 지고의 선으로 삼는 ‘아날로그 정신’ 은 시들지 않고 있었다. 최소한 녹향에서는 말이다.


대구골목 시간여행

※ 본 지도에서 계산성당과 제일교회 구당의 위치가 바뀌어 있습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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